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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부정공>명곡공휘창기묘갈명(明谷公諱昌驥墓碣銘)
明谷公諱昌驥墓碣銘 余與趙君泳善相知有年頃於方丈之役又澥逅其從父昌駿於華嚴簫寺倉卒叙話槩知爲忠信樂易非禮不蹈之吉士也旣而述其伯兄明谷公遺事屬以金石之文謹按公諱昌驥字養彦趙氏以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爲遠祖副護軍宗熺遯菴處士洹其祖若考外祖廣州李象參 純祖丙戌當宇庚辰其生卒公少業功令精緻簡易闡嗚場屋若經心進取與世俯仰則拾科第致通顯未嘗非分內事乃決意退步寓志林泉杜門却掃專心古道四書六經咀嚼反覆循環不巳於易則殆歜棗之嗜而菽粟之用也仰思俯讀臥起不撤三聖之言如舌是出則又著之文字有天人說養才說讀書五法斥邪說等篇出而應接可與酬酢如蘆沙奇公正鎭心菴趙公斗淳如淵金公大根稱其看文字精細鄕里一老人言衰年閒寂無由遺日公曰何不讀書老人曰年踰六旬雖讀何爲公曰父祖晩年兒孫初年兒孫模範其不在父祖乎其俛焉孿孿老而彌勤者如此雖然易之爲學用爲貴能言次之是以仲尼之易不越乎子臣友弟仕止久速而所願假年卒學者暘惟曰無大過而巳則本末之分斷可識矣公事親甚孝居窶善養病致憂喪致哀署不脫絰憊不薑桂朔望展墓莫之或闕友同氣如一身凄群從如手足交朋友盡切偲敎後進勉孝梯出則誦旅仆卦入則誦家人群居終日慮或解弛則誦乾卦以爲常噫若公殆聖人所謂行有餘力則以學文者也世有知德則其將編之小學啓蒙傳垂久遠可巳哉葬在谷城縣道上面楮田負癸之原配全州李氏基洪女有婦德育一男二女繼配和順崔氏鳳民女男馨燮有才無年女適金蓮淇以烈旌崔炳貞馨燮無嗣卽族兄定九子永塡子之女適朴敏植銘曰富兮貴兮彼何人斯行而學而公實以之最所致力四聖心訣于行于止視以爲則大旣先立餘皆可略刻辭貞石警示千億 月城 崔益鉉 撰 명곡공휘창기묘갈명(明谷公諱昌驥墓碣銘) 나와 조 영선(趙泳善)은 몇년전부터 서로 아는 처지였다. 어느날 지리산(智異山)엘 갔다가 우연히 화엄사(華嚴寺)에서 그의 종부(從父) 창준(昌駿)을 만나 창졸(倉卒)한 가운데 대화를 했었지만 그가 충신(忠信)하고 낙이(樂易)하여 예(禮)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길사(吉士)인 줄을 알았다. 그뒤 그는 그의 백형(伯兄) 명곡공(明谷公)의 유사(遺事)를 적어와 나에게 금석문(金石文)을 부탁한다. 그래서 그의 유사를 살펴보게 되었다. 공(公)의 휘는 창기(昌驥), 자(字)는 양언(養彦)이다. 조씨(趙氏)인 그는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충헌공(忠獻公) 원길(元吉)이 원조(遠祖)이며, 부호군(副護軍) 종희(宗熺)와 둔암처사(遯菴處士) 원(洹)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며, 외조(外祖)는 광주 이 상삼(李象參)이다. 순조(純祖) 병술(一八二六)년 고종 경진(庚辰)년은 그가 태어난 해와 세상을 떠난 해다. 공(公)이 젊어서 공령(功令)에 뜻을 두었는데 그 문장이 세밀하고 간이(簡易)하여 한때 과장(科場)에 명성을 떨친 적이 있었다. 만일 진취할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 호흡을 같이 했더라면 과거하여 통현(通顯)한 위치에 이르는게 그다지 분수 밖의 일이 아니었을 텐데, 끝내 뜻을 버리고 물러가 임천(林泉)에 숨어 문을 막고 고도(古道)에 마음을 쏟아 四서 六경을 수없이 반복 음미하여 말지 않았고, 특히 역(易)에 있어서는 잠조(歜棗)를 즐기듯 숙속(菽粟)을 쓰듯 하였고, 또 고개를 들어 생각하고 허리 구부려 글을 읽는 등 앉으나 서나 말지 않아 三성의 말이 흡사 자기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였고, 그것이 또 문자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천인설(天人説), 양재설(養才説), 독서五법(讀書五法), 척사설(斥邪説)등 편이 그것이다. 밖에 나가 남과 대할 때나 글을 주고 받을 때에 있어서도 노사(蘆沙) 기 정진(奇正鎭) 심암(心菴) 조 두순(趙斗淳), 여연(如淵) 김 대근(金大根) 같은 선비가 그의 문자(文字)가 정미롭다고 하였다. 어느날 마을에 한 노인이 말하기를 『왜?글을 읽지 아니 하는가!』 하고 말했다. 노인은 또 『나이 六十이 넘어 글을 읽어서 뭐 하겠소?』 하고 하였다. 이에 공은 또 말하기를, 『부조(父祖)에게 있어 만년(晚年)은 아이 들에게는 초년(初年)이니 아이 들에게 모범 될 일은 바로 부조(父祖)에게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그는 성실하여 늘그막에도 더욱더 부지런히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周易)」이란 학문은 그 씀씀이를 중하게 여기고, 말은 그 다음으로 한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역(易)에 있어서 자·신·우·제(子臣友弟)와 사·지·구·속(仕止久速)을 말하고, 또 「나의 원하는 바는 나를 몇 년만 더 살게하여 역을 더 연구하게 해 준다면 나에게 그다지 큰 허물은 없을 걸……」이라고 한 것을 보면 본(本)과 말(末)의 분간을 알 수가 있다. 공은 어버이에게 효도한 나머지 가난 하면서도 봉양을 잘하였고, 병환이 나면 걱정하고 초상엔 그 슬픔을 다하여 더워도 수요질(首腰絰)을 벗지 아니하고, 고달퍼도 강계(薑桂)를 먹지 않았으며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省墓)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았다. 형제들을 대할 때는 자기 몸을 대하듯 여러 종인(從人)에 대처할 때는 자기 수족(手足)같이 벗과 사귈때는 진실을 다하고 후진(後進)을 가르칠 때는 효제(孝梯)에 힘써야 할 것을 가르쳤으며 밖에 나갈 때는 「주역」의 여쾌(旅仆)를 외며 식구들과 함께 생활 했다. 그러다가 혹 마음이 해이(解弛) 해지면 건쾌(乾卦)를 외어 바로잡았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생활하였던 것이다. 아! 공(公)과 같은 이는 옛 성인(聖人)이 말한대로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곧 학문을 해야한다.」란 사람이라 하겠다. 세상에 지덕(知德)한 사람이 있으면 아마 「소학(小學)」 계몽(啓蒙) 전 같은 데에다 엮어 영원토록 전하게 하지 그대로 두고 말지 않을 것이다. 묘(墓)는 곡성현(谷城縣) 도상면(道上面) 저전(楮田) 계원(癸原)에 있고 부인인 전주 이씨(全州李氏) 기홍(基洪)의 딸로 부덕(婦德)이 있었고 一남 二녀의 자녀를 두었다. 둘째 부인은 화순 최씨(和順崔氏) 봉민(鳳民)의 딸인데 그가 낳은 아들 형섭(馨燮)은 일찍 죽고 딸은 김 연기(金蓮淇)에게 출가해 열녀(烈女)를 정려(旌閭)를 받았고 다른 한 딸은 최 병정(崔炳貞)에게 출가했다. 형섭(馨燮)은 아들이 없어 족형(族兄) 정구(定九)의 아들 영진(永塡)으로 양자를 하고 딸은 박민식(朴敏植)에게 출가했다. 다음과 같이 銘한다. 부(富)한 사람이면 그만이고 귀(貴)한 사람이면 그만인가? 富兮貴兮彼何人斯 행실과 학문을 공이 실로 밟아 왔네! 行而學而公實以之 정렬을 쏟은 바는 四성(四聖)의 심법 最所致力四聖心訣 행하는 것、 그치는 것、 보는 바대로 于行于止視以爲則 대체를 세웠으니 그 나머지 것에랴! 大旣先立餘皆可略 몇 마디 돌에 새겨 후손에게 보이 노라! 刻辭貞石警示千億 월성(月城) 최익현(崔益鉉)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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